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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19혁명, 국민이 일궈낸 민주주의

봉봉c 2020. 4. 1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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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혁명, 4.19혁명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입니다.


당시 시대적배경을 먼저 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고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중고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민주주의 정치교육의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도시 또는 준도시사람들이 대중매체를 널리 접촉할 수 있어 민주주의 가치를 인식시키게 됩니다.
그 결과로 젊은층이 기성세대들에 비해 인식이 민주적으로 전향되었습니다.
1952년에서 55년사이 인구 5만이상의 도시에서 인구가 28%이상 증가가 되면서 급속도로 도시화가 진행이 되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정치세력의 양극화도 생겨납니다.
1956년에서 58년사이 준봉투표가 팽배하여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준봉투표- 유권자의 교육수준이나 정치의식이 낮을때 지방의 유지나 교육을 받은
사람의 의견을 따라 투표하는 현상

 

 

민주주의 4.19혁명은 3.15부정선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는데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후보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진 

조병옥후보가 사망함에 따라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시 되었고 그래서 대통령 선거보다는 부통령선거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959년 3월 내무부장관으로 취임한 최인규가 '그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선생이 대통령,부통령이 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당시 이승만은 86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부통령으로 반드시 자유당 이기붕이 당선되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유고할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당쪽에서는 정권유지를 

위해 이기붕의 당선 또한 불가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자유당은 4할사전투표, 3인조.5인조공개투표, 완장부대활용, 야당참관인축출등의 다양한 부정선거를 

지시하게 됩니다.

*4할투표- 선거당일 금전으로 매수하여 다른 후보들을 기권하게하고 이렇게 기권한 유권자들의 4할정도의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둠.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미리 짜둔 3인조.5인조 별로 조장을 정하고 확인을 받아 투표하게해 이를 자유당
관계자에게 보여준 후 투표함에 넣음.
*완장부대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투표소 주변에 대기하게 하고 심리적압박을 주어 자유당에
투표를 하게함.
*야당참관인축출- 민주당측의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여러가지 사유를 두고 투표소에 입장을 못하게함.

 

 

이후 당시 함께 부통령에 출마하였던 장면후보가 180만, 이기붕 후보가 840만이라는 표차이가 나자
민심이 폭발하여 시민들 뿐아니라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까지 가세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였습니다.
선거당일밤 경남마산의 중고등학생이 주축이 되어 이에 관한 규탄시위가 일어나고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됩니다. 이러한 사태에서 마산상고의 학생 김주열군이 실종이 되고

후에 참혹한 시신이되어 마산부두에 떠오르게 됩니다. 이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마산사건관련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던중 정치깡패들에게 습격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을 시작으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고 4월19일 고등학생, 대학생들 3만여명이 거리로 

나오게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대학교수를 포함 초등학생들까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게됩니다.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서울뿐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청주, 전주, 인천에서 일어났고 당시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약 10만명이었습니다.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리게 된 1960년 4월 19일에 경찰들은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구를 겨눴고
이로인해 이날 100여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4월 25일 오후, 전국대학의 300여명이 되는 교수들이 서울대학교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을 합니다.
4월26일,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게되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뀌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1960년 4월 19일의 혁명은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었고 이러한 민주주의는 대통령도 아닌 정치인도 아닌
일반 시민들 즉 보통사람들이 이룬 결과입니다.
이날의 4.19혁명으로 희생된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과 그날의 국민들이 이룬 민주주의를 기억하고 
이제는 우리가 가꾸고 지켜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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